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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관람과 동적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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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데믹 등으로 직접적 경험 부족한 요즘 세대,
다양한 체험 통한 ‘동적 공감’ 연습 기회 필요


글 | 이지항 교수(성균관대학교 스포츠과학대학)


카타르 월드컵이 우여곡절 끝에 올해 11월에 개최된다고 한다. 처음 더운 날씨 때문에 겨울 개최에 관한 의견이 대두되었을 때는 동계올림픽 일정 등과의 마찰로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지만 결과론 적으로 보면 오히려 다행인 측면도 있다. COVID-19 때문에 일본과 중국이 올림픽을 치루며 호된 경험을 했고, 지역 예선전들 역시 그 영향을 받은 바 있었기에 아무래도 전통적인 5-7월 개최 보다는 11월로 미뤄진 개최가 좀 더 숨 돌일 여유를 가질 수 있게 하는 일정인 것 같다. 어쨌건 올림픽이건 월드컵이건 국제 스포츠 이벤트들에 대한 세상의 관심은 매우 뜨거운 것 같다. 한창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팬데믹, 그리고 국내의 여러 정치적인 이슈들에 의해 아직 월드컵에 대한 관심은 미루어져 있지만, 겨울에 들어서면서 또다시 많은 사람들이,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뤄왔던 스포츠 사랑을 발산할 것은 충분히 예상가능하다. 펜데믹의 영향 아래서도 보여주었던 도쿄와 베이징 올림픽 때의 응원을 기억한다면 말이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스포츠 이벤트에 열광할까? 국제 사회에서 조국의 위상을 높이는 뿌듯함 때문일까? 그런데 이런 열광은 비단 커다란 국제 경기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봄이 지나며 본격적으로 시작된 프로야구 경기는 방역 완화와 더불어 높은 흥행률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고 반드시 엘리트 수준의 스포츠를 보기 원해서인 것 같지도 않다. 공중파 방송에서는 축구, 농구, 배드민턴, 야구 등 거의 모든 종목에서 연예인들이 동네 클럽 수준에도 못 미치는 경기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높은 시청률을 차지한다. 그들이 보여주는 성장 스토리에 동감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일까?


체육학 분야에서는 이 같은 현상들에 대한 이유와 해답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민족의식 고취와 국위선양(혹은 지역감정)을 주제로 정치-문화적 해석도 있었고, 집단 내의 상호작용과 정서에 관심을 둔 사회-심리학적 분석도 이어진다. 대부분 타당하고 학술적인 의미가 높은 노력들이다. 다만 그래도 궁금한 것은 ‘왜 유독 스포츠 인가?’라는 점이다. TV에서 노래를 매개로 하는 성장 혹은 경쟁 프로그램 역시 매우 높은 관심을 끌고, 세계 수준의 경연에서 우승하는 음악가들도 종종 소개가 되며, 그들이 보여주는 ‘초 엘리트’ 수준 이상의 능력은 누가 경험해도 감동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어떤 분야도 스포츠만큼 많은 사람들의 높은 관심을 받고 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들의 특출한 스포츠 사랑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수많은 이유들이 서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발생하는 현상일 것이다. 또 여기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마디씩은 보탤 수 있을 만큼 이미 대중의 인식 수준이 높아졌다고 판단한다. 이런 뻔한 이야기를 반복할 의도는 없다. 그렇지만 평소에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우리의 스포츠 사랑에 대한 한 가지 이유에 대해 좀 자세하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스스로 겪은 경험 통해
이해력 높이는 ‘동적 공감’


‘리터러시(literacy)’라는 단어가 요즘 유행하는 것 같다. 그대로 해석하면 ‘문해력’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한문 뜻 그대로 문자를 읽고 쓰고 해석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뜻 그대로라면 스포츠 분야와는 정 반대편에 있는 개념일 것 같은데 이 단어를 소개하는 이유는 바로 체육 분야에서 종종 언급되는 ‘운동 리터러시’라는 개념 때문이다.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글씨를 읽고 쓸 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움직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움직임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접근으로 아동들의 운동 기능 발달의 근거가 되는 중요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공을 찬다는 움직임을 이해하기 위해서 공을 차는 동작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일 수 있다. 우리의 두뇌는 공을 차는데 동원이 되는 일련의 근육들을 언제 얼마만큼 수축시킬 것인가에 관한 계획을 사전에 준비하고 동작 도중에 모니터 하는 인지과정을 수행한다. 이 같은 경험을 통해 ‘공 차기’라는 하나의 움직임 레파토리가 두뇌에 저장되었을 때야 비로서 그 움직임에 대한 리터러시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같은 리터러시가 내가 만드는 움직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공을 차는 모습을 보고 이해할 때도 사용된다는 점이다.


남들이 공을 차는 움직임을 수행할 때 그것을 ‘공차기’ 동작으로 충분하게 이해하는 능력은 내가 공차기라는 동작을 레파토리로 가지고 있을 때만 가능하다. 내가 그 동작에 대한 리터러시가 있어야(literate) 한다는 말이다. 물론 내가 공을 차지 못하면 축구 슈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다. “축구를 유튜브로 배웠어요!”라는 농담이 있다. 성공적인 스포츠 수행을 위해서는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것 이외의 많은 요인이 존재한다. 작전을 세우고, 환경을 인식하는 등등의 요인들이 모두 갖춰질 때 성공적인 스포츠 수행이 이루어 질 것이다. 그러나 스포츠에서는 결국 동작에 의해 성과가 판명되는 만큼, 그 움직임을 수행할 수 (그래서 이해할 수) 없다면, 가장 본질적인 요인을 빼 놓은 경험이 될 수 밖에 없다.


내가 가진 움직임의 리터러시가 어떻게 다른 사람의 움직임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가를 설명하는 것은 ‘동적 공감 (kinesthetic empathy)’이라는 개념이다. 남을 이해하는 동감(sympathy)이라는 개념 이상으로 그 느낌을 공유한다는 의미의 ‘공감’은, 남이 움직이며 느끼는 것을 내가 실제 움직이는 것처럼 같이 공유하기에 그 움직임을 이해할 수 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다소 복잡하지만, 내가 공차기를 해 보았어야만 (리터러시가 있어야만) 남들이 공을 차는 것을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다(동적 공감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그냥 책상에 앉아서 나름 깊은 고민을 한 결과로 내린 논리학-철학적인 고민이 아니다. 최근의 인지-신경과학은 이 같은 논리를 가능하게 하는 증거물들을 속속 제시하고 있다. 움직임의 리터러시는 우리가 가진 다른 지식/기억과는 다른 원리로, 다른 장소에 저장되고 사용되어진다. 따라서 움직임의 리터러시라는 개념이 다른 지식과는 다른 특징을 가진다는 것은 꽤 오래전부터 알려진 내용이다.


운동 리터러시의 활동이 우리가 움직임을 만들어 낼 때 두뇌에서 동원되는 특유의 영역에서 관찰될 것이라는 점은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 가능할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실제 움직이지 않고 동적 공감만을 경험하는 (남이 공을 차는 것을 바라보기만 하는) 상황을, 다시 말하면 동적 공감을 전담하는 두뇌 영역들이 실제 인간에게서도 발견되었고 이들이 앞서 언급한 운동 리터러시 관련 영역들과 밀접한 연계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학자들이 ‘거울 뉴런 시스템(mirror neuron network)’ 이라 명명하고 현재 많은 관련 연구가 진행되는 이 동적 공감 관련 영역은 앞서 반복해서 언급한 ‘내가 공차기를 해 보았어야만 (리터러시가 있어야만) 남들이 공을 차는 것을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다(동적 공감이 가능하다).’라는 주장이 실체적 증거에 근거를 둔 것임을 알려준다.


운동 리터러시에 관한 이 같은 주장은 많은 불만(?)들을 야기할 것이다. 축구 경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이 축구 선수가 되어야 하는 걸까? 실제 많은 비 선수 출신 스포츠 해설가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충분한 이해 없는 의견만을 제시하는 걸까? 앞서도 언급했지만 한 가지 스포츠 종목을 관람하고 이해하고 또 즐기는 데에는 움직임에 대한 이해 이외의 다른 수많은 요인들이 영향을 미친다. 이런 요인들만으로도 관람하는 재미가 충분할 것이다. 관련 해서 좀 더 운동 리터러시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보면, ‘과연 얼마만큼 동작을 연습해야 리터러시가 생기는 것일까?’ 라는 궁금증이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다.


모든 사람이 손흥민처럼 공을 찰 수는 없을 텐데 그럼 우리는 그 동작을 보고 충분하게 이해 못한 상황에서 열광하는 걸까? 아니면 선수생활을 좀 한 사람들 정도면 충분한 걸까? 안타깝게도 아직은 여기에 대한 답안은 없다. 현재 몇몇 연구들이 있지만 대부분 선수 혹은 전문가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비교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다만 희망적인 것은, 생각 이외로 낮은 수준의 경험치 만으로도 우리가 최고 수준의 운동수행을 보고 동적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 라는 옛 말이 여기서도 적용이 되는 것이다. 공을 제대로 차보지 못한 사람도 축구 관람을 즐길 수는 있겠다. 그러나 동네 골목에서, 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차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최소한의 공차기 움직임 리터러시를 가지고 있고, 그것만으로 손흥민이 공을 차는 모습에서 동적 공감을 경험한다.


종 체험에 대한 충분한 영위 위해
반복적인 움직임으로 ‘리터러시’ 길러야


우리가 왜 유난히 스포츠 이벤트 관람에 열광하는가에 관한 질문을 글머리에 했었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우리가 가진 운동 리터러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릴 적 동네 골목에서, 체육수업을 통해, 아니면 조기 축구회에서 공을 차며 얻은 경험은 TV에서 보이는 선수들이 뛰는 모습에 동적 공감을 할 수 있게 한다. 내가 가진 경험이 많다면 그만큼 더 깊은 경험이 가능하다. 이 같은 현상은 다른 관람 형태에서 찾기 어려울 것이다. 어릴 때 혹은 취미로 악기를 연주하고 무용을 했던 경험을 통해 리터러시가 생성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그리 흔하지는 않은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다수의 예술 분야에서는 동적 공감 이외에 다른 형태의 공감/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스포츠 관람이 다른 관람 이벤트 보다 더 중요하거나 우월하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스포츠 이벤트를 ‘충분하게’ 영위하기 위해서는 스포츠 리터러시를 길러야 한다는 점이다. 앞서 소개했듯이 움직임에 관한 리터러시는 반복적인 움직임 연습을 통해서만 얻어진다. 책을 통해서도 비디오 시청을 통해서도 얻기 힘든 소중한 경험이다. 과거 우리는 그나마 어떻게든 공을 차고 달리기를 하는 경험을 해 보았고 그 덕분에 월드컵과 올림픽에서 짜릿한 동적 공감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은 운동 경험이 턱없이 부족하고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현장에서 수십년간 느끼고 있다. 다음 세대들이 움직임을, 스포츠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로 이 같은 동적 공감의 기쁨이란 개념을 두서없이 소개해 본다.


글 | 이지항 교수(성균관대학교 스포츠과학대학)

이지항 교수는 세종대학교 체육학과를 졸업하고 University of Oregon에서 운동제어전공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University of Oxford 생리학과, University of Birmingham 심리학과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고, 성균관대학교 스포츠과학대학에 부임한 후, 스포츠심리학과 운동제어/학습을 연구, 교육하고 있다. 최근에는 스포츠, 운동 상황에서 사람의 마음과 움직임에 관한 주제를 인지심리학적 시점으로 이해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