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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관련단체 적정기술, 그리고 따뜻한 공학기술 : 국경없는 과학기술자회(SEW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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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 배려 통한 ‘공존’ 가치가 중요
세상을 바꿀 착한 인재 육성이 필요하다


인류의 지속가능하고 건강한 미래를 고민하다보면, 어떠한 미래 세대를 길러야 할 것인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다. 적정기술은 화려한 삶은 약속하지는 못하지만, 누구도 배고파 울게 하지 않을 착한 인재들을 세상으로 불러내고 있다. 나눔과 배려를 통한 ‘공존’의 가치를 중요시 하는 인재, 기술을 긍정적인 모습으로 사용할 따뜻한 마음의 인재가 필요한 시대이다.


70억 세계인구 중에 절반이 하루 2달러 이하를 가지고 생활하고 그 중 10억 명은 1달러로 살아가고 있다. 20억이 넘는 사람들은 화장실이 없고 수돗물이 공급되고 있지 않다.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들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안전한 물을 공급받지 못해 수인성 질병으로 목숨을 잃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예전에 우리가 가졌던 과학 기술에 대한 믿음과 다르게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개발도상국과 선진국 간의 그리고 선진국 내의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이는 소득분배의 불평등을 초래하고 세상은 더욱 불행해지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적용에 있어서 무엇인가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


영국 식민지 상황에서 인도 독립운동을 했던 마하트마 간디가 물레를 돌리는 모습을 담은 사진은 널리 알려져 있다. 간디는 인도 독립을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이끈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물레를 돌려 무엇을 어쩌자는 것일까? 간디는 영국의 최신식 방적기계를 통해 값싸고 품질 좋은 직물들이 인도 사회에 대량으로 공급되면서 자국의 전통적인 직물 경제가 황폐화되어가는 모습을 보고 고뇌에 빠졌다. 그리고 그 대응으로 물레를 돌려 직접 옷을 만들어 입고 다녔다. 그는 인도 사회가 외국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 발전을 하려면 자국민의 상황을 고려한 기술 발전의 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간디의 통찰적 시각은 1965년 칠레 유네스코(UNESCO) 회의에서 영국의 경제학자 에른스트 슈마허에 의한 더욱 발전하였다. 슈마허는 선진국의 거대 기술은 원시적인 기술보다는 우수하지만, 부작용이 많을 수 있고 이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비용이 덜 들고 소박한 기술인 ‘중간기술(Intermediate Technology)을 소개하였다. 그는 중간기술이 라틴아메리카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중간기술의 개념은 훗날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의 토대가 되었다. 1980년대에 대학 생활을 한 필자는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책을 동료들이 많이 읽은 책 중의 하나로 기억하고 있다. 슈마허는 기술 발달이 직선적으로 세상을 풍요롭게 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인식하였다. 기술이 인간에게 좋은 모습이 될 것인지 여부는 결국 활용하는 사람의 몫이 된다.


따뜻한 과학기술, 적정기술


‘적정기술’은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문화와 경제와 환경에 맞는 기술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적정 기술의 핵심은 인간에 대한 관심에 있다. 이 속에서 기술이란 단지 기술과 과학만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겪는 문제를 해결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포함한다. 과학기술자는 단순한 기술개발자를 넘어 기술 사용에 대한 관심과 책임을 갖는 적극적인 엔지니어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적정기술은 기술 그 자체와 더불어 디자인, 비즈니스, 개발 협력 등 다양한 융복합 분야로, 창의적인 인재들을 필요로 하는 분야이자 가난한 이웃들의 삶을 이해하고 소외시키지 않는 이타주의를 함양한 착한 인재들을 필요로 하는 분야이다.


적정기술은 전 세계 약 90% 가난한 이들이 살고 있는 개발도상국가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유용한 기술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 들어 개발도상국은 물론 선진국에서도 적정기술이 기존의 첨단기술과 경제구조가 해결하지 못했던 다양한 사회 이슈를 해결하는 혁신적인 접근으로 각광받고 있다. 따라서 적정기술은 사회기술이자 복지기술 중의 하나로 불리기도 한다. 최근 정부가 적정기술을 국정 과제에 포함한 이유도 적정기술이 국가경제와 사회복지를 위해 필요한 기술임을 인식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국경없는 과학기술자회


소외된 90%를 위한 과학기술자들의 모임 지난 2009년 과학 기술이 결핍된 지역과 사람들에게 그 혜택을 나누어주려는 소박한 취지에 공감하며 적정 기술의 개발과 보급에 관심을 많이 가진 일군의 과학기술자들이 국경없는과학기술자회를 설립했다.


국경없는 과학기술자회의 활동은 주로 적정기술에 대한 대중적 인식 증진을 위한 학술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크게 (1) 개발도상국 지원을 위한 과학기술 연구개발에 주력하고 있으며, (2) 과학기술분야 국제개발협력을 위한 민간분야와 정부에 자문을 수행한다. 또한, (3) 적정기술 분야에 관심을 갖고 참여를 원하는 대학생과 일반인에 기회를 제공하고 글로벌 인재 육성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대학생 글로벌 봉사프로그램의 개발과 수행하며, (4) 적정기술에 대한 정보의 교류와 네트워크의 허브로서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이 중 국경없는과학기술자회가 수행한 따뜻한 활동 2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필리핀에서 온 한 통 전화, 도와주세요!


2012년 12월 필리핀 민다나오 지방의 다바오 시의 아니윔 초등학교에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초등학교인데 국경없는과학기술자회에서 급수시설 설치를 도와줄 수 있는지를 묻는 내용이었다. 아나윔 초등학교는 다바오시의 최빈민층 아이들을 무료로 교육하는 학교이다. 국경없는과학기술자회의 선발대가 현장을 방문했다. 비가 많은 우기에 빗물을 활용하는 방안과 비가 오지 않는 건기에 우물물을 이용하는 방안을 고안했다. 그리고 환경부에서 ODA 예산 지원을 받아 비교적 경제적인 방법으로 어린이들이 이용할 수 있는 급수시설을 설치할 수 있었다. 허드렛물과 먹는 물을 구분하여 먹는 물에 추가적인 정수장치를 설치했다.


1년이 지난 현재, 아나윔 초등학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축구를 하고 난 후에 샤워를 할 수 있고, 진흙탕 길을 걸어 등교를 할 때면 비닐로 발을 감쌌던 모습도 없어졌으며, 기숙사에는 새로운 수도시설 생겼고, 물 공급이 어려워 간헐적으로 개방되었던 화장실은 항상 깨끗해졌다. 정수 시설 설치 당시 학생 중 졸업을 한 학생들도 주말이면 찾아오곤 하는데 가장 먼저 달려가는 곳은 교실이 아니고 화장실이라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보람있는 일이었다.


적정기술 시설은 설치 자체 뿐 아니라 지속적인 관리와 이용이 중요하다. 실제로 성공적으로 설치된 기술들도 계속해서 사용되지 않고 방치된 사례들이 많다. 그런데 아나윔초등학교에서는 여전히 잘 이용되고 관리되고 있다. 아마도 아나윔 초등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이 이 시설에 대해서 주인의식을 가지고 관리를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한국의 기술자들이 꾸준하게 연락하고 찾아간 이유도 덧붙일 수 있겠다.


캄보디아에서 다일공동체 밥퍼와의 만남


우리는 ‘물퍼’로 하자! 2014년 2월 국경없는과학기술자회는 캄보디아 북부 시엠립에 위치한 다일공동체(대표 최일도 목사)를 방문하게 되었다. 시엠립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앙코르와트로 인해서 하루에도 수천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활력이 넘치는 도시이지만 다일공동체가 위치한 톤레삽이라는 호수 주변은 매우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구상에서 가장 큰 담수호로 알려진 톤레삽 주변임에도 안전한 물을 얻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다일공동체는 그곳에서도 국내에서 이미 널리 알려져있는 ‘밥퍼’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지원 활동이 없다면 밥을 굶을 수 밖에 없는 500명 가량의 아이들에게 따뜻한 밥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런데 밥을 제공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안전한 물이 부족했다. 처음에는 우물을 파서 사용하였으나 그나마 우물물이 오염되어 최근 들어서는 물을 구입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국경없는과학기술자회가 방문한 것은 이러한 상황을 전해 듣고 정수용 급수장치를 설치하기위해서였다.


이른바 '물퍼‘ 활동의 시작이었다. 급수 장치는 최대한 간편하고 유지 관리가 쉬워야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제작 설치했다. 또한 바이오 모래여과장치를 전처리시설로 설치하여 정수 필터 부담을 덜고자 하였다. 급수장치를 설치한지 10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일주일에 2-3 차례는 가동 이상 유무에 대해 현지로부터 소식을 전해 듣고 있으며 지난 10월에는 물 사용 용량을 늘리고, 관리가 더욱 쉬운 장치를 추가 설치하였다.

적정기술 활동이 우리에게 특별한 이유는?


우리나라는 특별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식민지 경험을 하고 원조수혜국에서 원조공여국이 된 유일한 국가이다. 전후 전쟁의 폐허로부터 최빈국 지위에서 도약하여 OECD 회원국이 되었다. 우리 자신의 노력에 힘입은 바 크겠지만 선진국가의 도움도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해외 원조로서의 적정기술 활동은 우리사회가 겪은 역사적인 경험을 지구촌 사회와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에도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개발도상국 국가에서의 적정기술 활동은 정겹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하다. 미국, 유럽이나 일본과 같은 선진국에서의 경험은 왠지 큰 차이가 나서 그들의 경험과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에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험은 친근감이 있다는 것이다.


적정기술이 활발해지면서 관련 영역도 다양해지고 있다. 적정기술 교육 프로그램 개발과 해외 자원 활동, 과학기술 전문가들의 기술나눔운동,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활동과 사회적 기업 설립을 통한 사회적 가치 창출과 일자리 창출, 정부의 ODA 사업 및 개도국 과학기술 지원 사업을 통한 적정기술 사업 수행 참여, 민간단체의 적정기술을 통한 개발협력 활동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민간차원에서 시작된 적정기술 활동이 이제는 우리 정부의 국정과제로 채택되어 원조 프로그램의 중요한 사업으로 대두되면서 원조의 패러다임 전환도 주목해 볼만하다. 국내에서 적정 기술에 대한 여러 가지 담론들이 제기되었으며 현재는 기술에 대한 실증적 작업과 완성도에 대한 엄격한 평가를 감수해야 하는 시점이다. 적정기술에 대한 우려에 대한 시각에도 불구하고 ‘인류공존’을 위한 기술임에 대한 희망을 저버릴 수는 없다.
  착한 인재가 세상을 바꾼다.


인류의 지속가능하고 건강한 미래를 고민하다보면, 어떠한 미래 세대를 길러야 할 것인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다. 적정기술은 화려한 삶은 약속하지는 못하지만, 누구도 배고파 울게 하지 않을 착한 인재들을 세상으로 불러내고 있다. 나눔과 배려를 통한 ‘공존’의 가치를 중요시 하는 인재, 기술을 긍정적인 모습으로 사용할 따뜻한 마음의 인재가 필요한 시대이다. ‘적정기술의 교육적 가치에 대한 희망’이란 ‘세상을 바꿀 착한 인재 육성에 대한 희망’을 의미하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20세기 과학기술교육이 과학기술을 교육하여 교육된 이들을 사회에 내보내는 단선구조였다면 21세기 과학기술교육은 과학기술이 사회적으로 갖는 의미와 사회가 과학기술에 요구하는 책무를 아울러 교육하는 유기적이고 통합적인 교육을 요구하고 있다. 적정기술은 어려운 이웃들에게 필요한 기술이자 현지의 열악한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단순한 기술이며 구매력이 적은 사람들이 살 수 있을 정도의 저렴한 기술이다. 그러므로 적정기술은 학생들에게 따뜻한 인간의 모습을 지난 과학기술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21세기 필요한 창의적 과학기술 인재를 육성하는 데 마중물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인간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적정기술 활동이 담고 있는 메시지가 우리 청소년들에게 기존의 교육체제가 갖는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지 않을까?
최근 들어 필자에게 적정기술에 관심을 가지고 이러저러한 문의를 하는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많다. 그만큼 사회적으로 적정 기술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 듯하다. 물론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가장 트렌디한 분야의 아이템을 구해서 각종 탐구대회에 참가하여 입상해서 대학 입시를 위한 하나의 스펙을 만들려는 생각일 수도 있겠다. 의도와 상관없이 제대로 하려고 한다면 적정 기술을 개발하고 설계하는 과정은 과학의 기본 원리를 매우 구체적으로 익히며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과정으로 더없이 좋은 과학교육의 과정이다. 더군다나 단순한 도구의 발명이라는 차원을 넘어 그것을 사용할 사람과 환경을 오래도록 깊이 고민할 수밖에 없기에 세상에 대한 애정과 이해를 동반하게 된다. 요컨대 과학기술로서 적정기술은 성적만을 올리기 위한 입시 도구이거나 화석화된 지식이 되기 어렵다.


과학기술에 이해를 가지고 어려운 이웃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적정기술 활동에도 참가하면서 단체 생활도 익히고 리더십도 함양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따뜻한 과학기술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 수 있기를 바라는 입장에서 필자는 우리나라 청소년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을 때 지체없이 ‘국경없는 과학기술자요!’라고 답을 하는 학생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해본다.


글 | 윤제용 교수(서울대학교, 국경없는과학기술자회 회장)
윤제용 교수는 서울대학교 공업화학과를졸업하고, 뉴욕주립대에서 환경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아주대학교 환경공학과 교수를 거쳐 1999년부터 서울대학교 화학생물공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현재 담수화 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대한환경공학회, 대한상하수도학회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또한 과학기술 나눔 봉사 연구단체인 (사)국경없는과학기술자회 회장을 맡아 글로벌 인재교육, 창의적 공학교육 봉사 및 개발도상국 지원을 위한 적정기술 연구와 실증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