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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시대의 과학관 -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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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ing Science · Learning Science에서 Doing Science 공간으로
인공지능에게 일시키고 우리는 과학과 함께 놀자


21세기에 막 들어섰을 무렵 우리나라에서는 ‘이공계 기피 현상’이 문제였다. 불과 몇 년 후 이제는 문사철로 대표되는 인문계 학과를 줄이고 공학계 학과 정원을 늘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취업률과 인공지능 그리고 자유학기제까지 맞물리면서 과학관에는 중고등학생들의 관람이 늘고 있고 각 학교에서 협력 프로그램을 운영하자는 제안이 많이 오고 있다. 그런데 그 많은 제안을 과학관들이 다 수용할 수 있을까? 그리고 과학관은 학교와 사회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일까?


“인간이 졌다.” 지난 3월 9일 언론은 이렇게 대서특필했다.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연초에 인공지능 프로그램 알파고가 이세돌에게 감히 도전장을 내밀었을 때 우리는 코웃음을 쳤다. 적어도 올해는 이세돌이 완승한다는 게 일반적인 예측이었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뭐든지 처음이 어렵지 익숙해지면 편해지기 마련이다. 두 번째 판과 세 번째 판을 이세돌이 내리 지자 우리들은 되레 충격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담담히 현실을 받아들였다. 나에게는 인공지능의 비약적인 발전 속도보다 오히려 분노와 좌절 대신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인류의 적응성이 더 놀라웠다.
여기에는 아마도 이세돌의 품성이 한몫했을 것이다. 5:0 또는 4:1로 가볍게 이길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던 이세돌은 지는 게임의 수가 쌓여 가는 와중에도 침착했다. 세 판을 잇따라 내준 이세돌 9단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의 패배는 이세돌이 패배한 것이지 인간이 패배한 것은 아니지 않나. 그렇게 생각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최고의 바둑 고수가 던진 이 한 마디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던가.


“한 판을 이겼는데 이렇게 축하를 받아본 것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3연패 후 한 판을 이기니까 이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많은 격려 덕분에 한 판이라도 이긴 게 아닌가 합니다. 감사합니다.” 3월 13일 늦은 오후 이세돌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이 말에 환호하고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세 판 내리 지다가 겨우 한 판 이긴 게 대수가 아니었다. 세 판을 내리 진 다음에도 그리고 한 판을 이긴 다음에도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았던 이세돌에게 위안을 받은 것이다. 이세돌의 품성에서 우리 인류가 인공지능에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본 것이다. 앞으로 3월 13일은 인류가 인공지능 알파고에게 이긴 하루라고 기억될 것이다.


과학관은 새롭게 진화해야 한다


21세기에 막 들어섰을 무렵 우리나라에서는 ‘이공계 기피 현상’이 문제였다. 불과 몇 년 후 이제는 문사철로 대표되는 인문계 학과를 줄이고 공학계 학과 정원을 늘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취업률과 인공지능 그리고 자유학기제까지 맞물리면서 과학관에는 중고등학생들의 관람이 늘고 있고 각 학교에서 협력 프로그램을 운영하자는 제안이 많이 오고 있다. 그런데 그 많은 제안을 과학관들이 다 수용할 수 있을까? 그리고 과학관은 학교와 사회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일까?


현재 한국과학관협회에 등록된 과학관은 국립 10, 공립 72, 대학 2, 사립 39개로 총 123개에 이른다. 이 외에도 테마과학관과 천문대를 포함하면 200개가 훌쩍 넘는다. 특히 수도권에는 서울에만 9개, 경기도에 14개 등 23개에 이르며, 과천국립과학관은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과학관이고, 창경궁 옆의 옛 국립과학관은 새로운 어린이과학관으로 곧 개장할 예정이다. 그리고 내년 4월이면 노원구 하계동에 서울시립과학관이 새로 개관할 예정이다.


진화란 환경에 대한 적응이다. 그리고 진화의 결과는 진보라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다. 사회가 변하면 과학관도 진화해야 하고 그 결과로 다양한 과학관이 등장해야 한다.


과학관의 제1세대는 ‘전시 · 휴게 공간’이었다. 놀랍고 멋진 전시물을 보고 “와, 멋있다. 나도 저렇게 멋진 과학자가 되어야지.”라는 꿈을 꾸면 족한 곳이었다. 즉 Seeing Science를 위한 공간이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세계 대부분의 과학관들이 이 형태에 속한다. 실제로 2014년에 서울연구원이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아직도 일반 시민 가운데 52%는 과학관을 ‘신기한 전시물 관람 공간’으로 인식한다.


과학관의 제2세대는 ‘체험 · 교육 공간’이었다. Learning Science를 위한 공간이다. 한마디로 약간의 체험을 하거나 학교에서 다루지 못하는 실험을 하는 곳이다. 그리고 다양한 강연을 들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강연을 통해 국내 최고의 과학자들을 만날 수도 있다. 이 정도 수준에 오른 과학관은 실제로 그리 많지 않다. 우리나라의 경우 5개의 주요 국립과학관과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위의 조사에서 학생들의 44%가 과학관을 ‘전시물을 통해 과학을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과학관의 제3세대는 시민이 직접 ‘과학을 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Seeing Science와 Learning Science를 넘어서 Doing Science를 하자는 것이다. 위의 설문에서 교사들의 69%가 과학관을 ‘창의체험활동 공간’으로 인식했다. 교사들이 과학관을 이렇게 인식한다고 해서 우리나라에 그런 과학관이 있는 것은 아니다.


Doing Science 하는 과학관의 선진 사례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없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이 샌프란시스코의 익스플로라토리움을 예로 들지만 거기도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익스플로라토리움은 규모가 무척 큰 곳이다. 시민들이 직접 과학을 하는 곳이라기보다는 전국의 과학교사들이 새로운 과학교육과 실험 컨셉을 체험하고 배우는 연수기관의 성격이 진하다. 이런 성격의 과학관은 매우 어렵다.


선진사례도 없는데 우리가 굳이 해야 하는가? 다른 나라 박물관이 못 하는 이유는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 일찍 지어졌기 때문이다. 마치 독일에 기계식 전화기와 ISDN 망이 일찌감치 전국에 깔리는 바람에 우리나라보다도 전자식 전화기와 ASDSL 망이 나중에 깔리게 된 것과 같다. 이제 우리가 먼저 하면 된다.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은 무엇을 할 것인가?


알파고 덕분인지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쓴 <사피엔스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바람이 불고 있다. 4월말까지 이미 12만 부 이상이 팔렸다고 한다. 100만 부 이상 팔렸지만 끝까지 읽은 사람은 별로 없는 <정의란 무엇인가>와 달리 이 책은 대부분의 독자들이 끝까지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명징한 논리로 한달음에 달려가는 깔끔한 필치와 능숙한 번역 때문이다.
지난 4월 29일 유발 하라리 교수가 서울시청 8층에 와서 짧은 강연 후 박원순 시장과 북토크를 나누었다. 유발 하라리는 인류는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일이나 해야 하며 그 일마저 나중에는 인공지능이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때 박원순 시장은 한 고위간부를 지목하여 “앞으로 인공지능이 다 한다는데 그러면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하나요”라고 의견을 물었다. 그 간부는 “인간이 인공지능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노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물론 이 대답에는 인공지능이 사람들의 일자리를 아무리 빼앗을지라도 자본주의는 작동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이 카이스트 김대식 교수가 신작 <인간 vs 기계>에서 말하는 ‘기본소득’이든 아니면 다른 방책이 있든 사람들은 일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방책이 있을 것이라는 예측이 바탕에 깔려 있을 것이다.


이 담담한 대답에 통쾌함을 느꼈다. 부산대학교 물리교육학과의 김상욱 교수가 예전에 페이스북에서 했던 “일은 인공지능에게 시키고 우리는 놀자”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였다. 어느새 이세돌의 품성이 전염되고 있다. 아니면 우리는 몰랐지만 우리에게는 이런 멋진 품성이 기본적으로 장착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앞으로 힘들고 복잡한 일은 인공지능과 로봇에게 맡기고 우리는 우리가 잘할 수 있는 일, 바로 ‘놀이’에 매진할 일이다. 그렇다면 ‘놀이’의 핵심 요소는 뭘까? 왜 노는 게 그리도 즐거울까? 바로 ‘실패’가 있기 때문이다.


숨박꼭질 놀이가 재밌는 까닭은 아무리 숨어도 결국에는 들키고 말고, 고무줄 놀이가 재밌는 까닭은 결국에는 고무줄에 걸려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술래가 절대로 찾지 못하고 고무줄을 아무리 높이 들어도 명랑하게 노래를 부르며 끝까지 넘을 수 있다면 그 놀이는 재미가 없다. 놀이가 재밌는 까닭은 결국에는 실패한다는 사실을 아이들이 잘 알고 있고, 그 실패를 아이들이 담담히 받아들이고 납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실패는 우리를 즐겁게 한다.


과학관은 실패를 경험하는 곳이어야 한다


과학도 그렇다. 나는 감히 말한다. ‘과학은 실패다.’ 과학은 원래 실패하는 것이다. 그게 계산이든 사고이든 관찰이든 실험이든 과학자의 일상은 일패의 연속이다. 100번에 한 번쯤 성공한다. 과학자들은 이 실패에 좌절하지 않는다. 원래 과학은 실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실패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좌절하면 데이터를 조작하고 남의 논문을 베껴 쓰게 뒨다.


우리에게는 과학을 쉽고 재밌게 풀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과학은 어렵다. 어려운 것을 쉽게 풀려는 강박은 결국 어려운 것을 빼고 쉬운 것만 보여주는 결과를 낳았다. 나는 지난 3월 프랑스 파리의 라빌레트 과학관과 자연사박물관을 다녀왔다. 우리와는 분명히 다른 점이 눈에 보였다. 우선 전시물의 설명 패널의 글자가 작고 길었다. 그리고 동영상도 길이가 보통 5분이 넘었고 심지어 7분, 11분짜리도 있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작은 글씨로 길게 쓰여진 패널을 읽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동영상도 3분이 넘으면 보지 말라는 것과 같다. 그런데 프랑스 사람들은 그 긴 설명을 찬찬히 읽는다. 상영 중인 동영상 앞에 온 사람은 우선 중간부터 본 후 동영상을 다시 틀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본다. 중간에 일어설 것 같은데 끝까지 본다. 왜? 엉덩이가 무겁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람들의 무거운 엉덩이는 부모로부터 유전자로 물려받은 것(nature)이 아니다. 양육된 것(nurture)이다. 과학관과 박물관에 아이들을 데려 온 부모와 조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차분함을 몸소 보여줌으로써 가르쳤다. 때로는 강제적으로 아이들을 주저앉히곤 했다. 기껏해야 초등학교 1~2학년밖에 안 된 두 아이에게 찰스 다윈의 따개비 연구에 관한 지루한 이야기를 힘들여 읽어주며 설명하던 백발의 할아버지가 프랑스 과학 융성의 근원인 것 같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단 3년만에 구글의 인공지능을 뛰어넘겠다는 호기로운 순발력보다는 지루한 이야기도 한 시간쯤은 끈덕지게 들어줄 수 있는 무거운 엉덩이를 만드는 게 먼저 아닐까.


과학관은 일반인들에게 과학을 경험하게 하는 곳이다. 관람객들은 과학관에서 찬란한 과학의 업적들을 보고 감탄한다. 전시물만 보면 과학자들은 보통 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는 천재들인 것 같다. 과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키워야 할 과학관에서 오히려 ‘아, 과학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구나. 과학자가 될 사람은 따로 있어.’라는 생각에 빠질 수도 있다.


이제는 과학관도 ‘실패’를 경험하는 곳이어야 한다. 실패가 거듭되고 일상이 되면 그것은 우리의 놀이가 된다. 인공지능 시대에 놀이의 근육을 단련시키면서 이세돌의 품성을 품으려면 ‘실패’에 익숙해져야 한다. 실패하기 위해서는 일단 해봐야 한다. 과학관은 과학을 보는 곳이 아니라 과학을 직접 해보고 실패하는 곳이어야 한다.


글 | 이정모(서울시립과학관장)
이정모 관장은 연세대학교 생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독일 본 대학교 화학과에서 곤충과 식물의 커뮤니케이션을 연구했으며, 안양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근무했다. 현재 서대문자연사박물관 관장으로 재직 중이며, 어린이들에게 자연과 과학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애쓰고 있다. 옮긴 책으로 《제이크의 뼈 박물관》, 《인간 이력서》, 《모두를 위한 물리학》, 《과학 시간에 함께 읽는 에너지 교과서》 등이 있고, 지은 책으로는 《그리스 로마 신화 사이언스》, 《삼국지 사이언스》(공저), 《과학하고 앉아있네 1》(공저), 《해리포터 사이언스》(공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