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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가 들려주는 과학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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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에 도전하는 학자의 삶과

세상을 바꾼 이론들


인류의 역사상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온 것은, 지극히 소수의 천재 과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천부의 재능을 꽃피웠고,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아이디어로 새로운 연구를 시작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지식과 학문을 추구하기 위한 희생을 아끼지 않았고, 과학 연구를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했으며, 자신의 능력을 모두 쏟아부었다. 과학자로서 힘든 생활을 이겨낸 이들을 보면 어린 시절의 경험이 좋은 성장 동력의 역할을 한다. 그들의 어린 시절을 보면 좋은 집안에서 교육을 잘 받아 성장한 경우도 있지만, 학교 교육이 맞지 않아 학교를 자퇴한 사람도 있고, 가난하거나 아파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경우, 또는 여자라서 학교를 가지 못한 경우 등 다양한 성장 배경을 가지고 있다. 과학자의 꿈을 키우는 학생들에게 다양한 과학자의 어린 시절의 성장 과정과 연구 과정을 통해 과학자로서 가는 길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


 미래로의 시간여행을 가능하게 한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아인슈타인 (1879-1955) 상대성 이론은 20세기 최고의 천재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에 의해 이루어진 일반인들의 상식을 뒤집는 혁명적인 이론입니다. 이런 천재의 어린 시절은 남들과 달리 어떤 모습이 있을까요? 이 글에서는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원리의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는 어린 시절의 아인슈타인의 삶에 대해 간단히 얘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인슈타인은 1879년 3월 14일 독일 남부의 울름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한 살이 되는 해에 독일 남부의 최대 도시인 뮌헨으로 이사하였습니다. 뮌헨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우리나라의 인문계 중고등학교 과정을 합친 학교인 김나지움에 진학합니다. 자기가 읽고 싶어하는 책만을 읽고 혼자 조용히 생각에 잠기기를 좋아하는 아인슈타인에게 독일의 김나지움에서의 수 업은 견디기 힘든 과정이었습니다.


이 당시 아인슈타인이 좋아하는 과목은 오직 물리 학과 수학뿐이었고 그 외의 과목에는 별 관 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연과학 중에서도 생물 성적은 형편 없었습니다. 특히 그가 가장 자신이 없었던 과목은 프랑스어와 라틴어였는데 김나지움 시절 그는 이 두 과목에 낙제를 당하고 이 두 과목의 선생님들은 아인슈타인을 ‘문제아’로 간주하였습니다. 게다가 유태인인 아인슈타인을 대해주는 태도가 그리 곱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므로 그의 성격은 약간 자폐적으로 되었고 이로 인해 학교를 가지 않는 행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유로운 학습을 방해하고 획일적인 전체주의식 교육에 지친 아인슈타인은 뮌헨의 김나지움을 자퇴합니다. 김나지움을 중퇴한 아인슈타인에게는 독일의 대학에 진학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독일의 대학은 고교 중퇴자에게는 입학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독일 남쪽의 작은 영세 중립국 스위스의 취리히에 있는 연방공과대학은 김나지움을 중퇴한 사람에게도 입학시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대학에 진학하여 물리학을 계속 공부하고 싶어하는 아인슈타인은 연방공과대학의 입학시험을 치렀습니다. 수학과 물리학 시험에서는 좋은 점수를 냈지만 독일어와 생물학과 같이 아인슈타인이 관심이 없어했던 과목에는 낙제 점수를 받아 아인슈타인은 입학시험에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당시 아인슈타인의 답안지를 채점했던 수학과의 민코프스키 교수는 아인슈타인의 탁월한 수학실력을 높이 여겨, 그에게 스위스 북부에 있는 아라우 주립학교에 편입하기를 권유했습니다.


뮌헨의 김나지움과 달리 자유로운 환경에서 수업을 진행하는 아라우 주립학교는 아인슈타인에게 딱 맞는 환경이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 학교에서 전 과목에 우수한 성적을 냈는데, 특히 아라우 학교 시절 아인슈타인에게는 ‘만일 사람이 거울을 보면서 빛의 속도로 달리면 거울에 자기의 얼굴이 보일까?’하는 의문이 생겼다. 이것이 후일 아인슈타인의 ‘빛의 속도가 변하지 않는다는 원리’의 동기가 됩니다. 아라우 주립학교를 졸업하고 아인슈타인은 연방공과 대학에 재도전하여 물리학과에 입학합니다. 1900년 연방공과대학을 졸업하고 2년 동안을 실업자로 보낸 아인슈타인은 1902년 6월 24일 스위스의 수도 베른의 특허국 공무원으로 취직합니다.


이 당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업무를 오전에 다 해결하고 오후에는 자신이 관심이 있는 물리연구를 계속했습니다. 그로부터 4년 뒤에 드디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논문인 특수 상대성 이론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고 이 때부터 아인슈타인은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아인슈타인은 16살 때 ‘빛의 속도로 달리면서 빛을 보면 어떻게 될까?’라는 의문을 품었습니다. 뉴턴 역학대로라면 시속 100km로 달리는 자동차를 시속 100km로 나란히 달리면서 그 자동차를 보면 그 차는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빛의 속력으로 달리는 사람이 나란히 움직이는 빛을 볼 때 빛이 정지해 있는 것으로 보일까, 하는 문제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이 문제에 매달린 아인슈타인은 혹시 뉴턴의 물리학이 빛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경우에는 성립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었습니다. 그는 당시 모든 사람이 완벽하게 믿어 온 뉴턴의 물리학을 뒤집은 혁명적인 논문을 준비하게 됩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을 이용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원하는 미래로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실현되려면, 빛의 속도에 가까운 속도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현재까지 사람을 태운 로켓이 낼 수 있는 속도는 빛의 속도에 비하면 너무너무 느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가까운 미래로만 갈 수 있습니다. 현재의 속도로 평생 동안 움직여도 일 초 후의 미래로도 갈 수 없을 정도로 가까운 미래이다. 언젠가 아주 먼 미래에 우리가 빛처럼 빠른 로켓을 만들게 되면 우리는 언제든지 원하는 미래로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가능하게 한 것은 천재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16세 때의 고민이었습니다.


 최고의 실험 물리학자, 전자기학의 아버지 

Michael Faraday 마이클 패러데이 (1791-1867) 마이클 패러데이는 유복하지 못한 집안에서 태어나 정규학교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평범한 아이였지만 창의적인 재능과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오늘날 현대 전기 산업에 기초가 되는 발전기와 전동기의 기초가 되는 전자기학 분야에 많은 기본 법칙을 발견한 위대한 과학적 업적을 남겼습니다.


패러데이는 1791년 런던 교외의 뉴잉턴에서 가난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집안 형편에 패러데이는 읽기와 쓰기, 간단한 셈하기 정도만 배우고 학교를 그만두고 제본소에 들어가 책 만드는 일을 배웠는데 이 시기에 여러 책을 접하면서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제본소에서 일하며 읽은 전기에 대한 책이 너무나 신기했던 패러데이는 과학을 진지하게 공부해 보기로 결심하고, 값싼 실험 기구들을 사서 혼자 간단한 실험을 하고 실험 결과를 공책에 꾸준히 기록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왕립 과학연구소에서 열리는 공개 강연을 들을 수 있는 수강증을 얻게 되었습니다. 공개 강연회는 부자들만이 갈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패러데이에게는 매우 큰 행운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강연은 세계적인 과학자 데이비의 강연이었어요. 그 당시 데이비는 영국왕립과학연구소의 화학 교수였고, 전기화학분야의 전문가였어요. 패러데이는 데이비의 강연 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노트에 적어왔고 집에 돌아와서 열심히 복습을 했어요.


공부를 하면 할수록 과학에 열정을 가지게 된 패러데이는 왕립 과학 연구소에 일자리를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답장을 받지 못했어요. 이번에는 데이비의 공개 강연 노트를 정성스럽게 정리하여 다시 써서, 예쁘게 책으로 만들어 데이비에게 보냈어요.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데이비에게서 자신의 실험 조수로 일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답장이 온 것입니다. 그날로 패러데이는 왕립 과학연구소에서 데이비의 실험 조수로서 일하게 되었지요. 데이비의 조수로 일하는 동안 패러데이의 과학지식은 엄청나게 자라났습니다.


연구소에서 다양한 물리학과 화학분야의 연구논문을 통해 자신의 명성을 쌓아갔고, 1824년 왕립학회 회원이 되어 그 다음해는 왕립연구소 실험소 소장이 됩니다. 1820년 외르스테드는 전류가 흐르는 도선 주변에 나침반을 놓아두면 N극이 가리키는 방향이 달라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전류가 흐르는 곳 주위에서 자침의 방향이 바뀐다는 것은 전기가 자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외르 스테드의 발견이후 전자기효과는 많은 과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패러데이는 고정된 자석 주위에 전류가 흐르는 전선을 놓으면 전선이 빙글빙글 돈다는 사실을 1821년 <새로운 전기-자석의 운동과 자기 이론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통해 발표하였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전동기입니다.


하지만 패러데이가 만든 전동기는 오늘날 사용하는 전동기와는 달리 자석주위를 돌기만 할 뿐, 일을 하지는 못했어요. 선풍기 날개처럼 회전운동을 하는 최초의 전동기는 10년 뒤에 헨리라는 과학자가 처음으로 발명했습니다. 1831년 패러데이는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전지를 연결하지 않은 회로에서 도선의 일부를 동그란 고리 모양으로 만들고, 이 고리 안으로 막대자석을 가까이 가져다대는 순간 회로에 전류가 흘렀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 페러데이는 전지를 연결하지 않은 고리형 회로에 가해지는 자기력이 변하면 회로에 전류가 흐른다는 사실을 알아냈어요. 이것을 패러데이의 전자기 유도 법칙이라고 합니다.


외르스테드의 발견 이후로, 많은 물리학자들은 전류로 자석을 만들 수 있다면 자석으로 전기를 만들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그들은 자석과 회로 사이의 거리를 조절하여 자기력을 변화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회로에 전기가 흐르지 않았지요. 하지만 패러데이는 고리 앞에서 자석을 움직여 회로가 받는 자기력을 변화시킴으로써 전류를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전자기 유도 법칙은 막대자석 대신 전자석을 사용할 때도 적용됩니다. 패러데이는 고리형 회로의 맞은 편에 전류가 흐르지 않는 전자석을 고정시켰어요. 물론 회로에도 전류가 흐르지 않았지요. 하지만 전자석에 전류를 흘려보내자 회로에도 전류가 흐르기 시작했어요.


고리에 자기력이 작용한 순간 고리가 받는 자기력이 변해 회로에 전류가 발생한 것이지요. 전자기유도 원리를 이용하여 말굽자석의 양극사이를 구리판의 가장자리가 지나도록 하여 구리판을 회전시켜서 연속적으로 전류가 흐르는 장치를 고안하여 최초의 발전기를 발명하였습니다. 패러데이는 영국 국민들이 가장 사랑한 과학자, 겸손한 과학자의 대명사로 기억된다. 그의 삶을 찬찬히 따라가 보면 뛰어난 과학적 업적보다 겸손한 인품과 성실함이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패러데이는 과학이란 학문을 대중화한 사람이기도 했다. 1826년 그가 만든 ‘아이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강연회’는 지금까지도 런던 왕립 협회의 전통으로 내려져온다.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그녀의 방사능 이야기 

Marie Curie 마리 퀴리 (1867-1934). 마리 퀴리는 최초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 최초의 여성 물리학과 교수, 최초로 노벨상을 두 번 수상한 사람 등 화려한 수식어를 가진 20세기 최고의 여성 과학자입니다. 마리 퀴리는 천연 방사선 원소인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했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방사선을 이용해 부상병들을 위한 구호 활동을 펼쳤으며, 1918년에는 라듐 연구소의 초대 소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마리 살로메 스클로도프스카는 1867년 폴란드의 바그샤바에서 태어났어요. 마리의 아버지는 중학교 물리교사였고 어머니는 여학교 교장이었습니다. 열 살 때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저축한 돈을 잘못 투자해 모두 잃어버리고 난 뒤에는 가난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려워진 집안 형편에도 굴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한 마리는 1883년에 바르샤바 국립여학교를 일등으 로 졸업하며 금메달을 받았어요. 가난한 집안 형편을 돕기 위해 가정교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계속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에 마리는 결국 1891년, 폴란드를 떠나 파리의 소르본 대학교에 입학했지요. 그곳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동시에 공부한 그녀는 1893년에 물리학과를 1등으로 졸업하고 그 이듬해에는 수학과를 2등으로 졸업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학교의 물리화학 실험실에서 연구를 하며 지냈는데 이곳에서 자석에 대한 물리학을 연구하던 피에르 퀴리를 만났어요. 1895년 7월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이때부터 마리는 퀴리부인으로 불리게 되었어요.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리게 된 그해 11월 독일 괴팅겐 대학교의 뢴트겐 교수가 최초의 방사선인 X선을 발견합니다. 이듬해에는 베크렐이 우라늄이 섞인 광물 중에 방사선을 방출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우라늄에서 나오는 방사선 역시 X선과 마찬가지로 단단한 물질은 투과하지 못하고 부드러운 물질만을 투과할 수 있었어요. 베크렐의 천연 방사선 발견은 퀴리 부부에게 큰 자극이 되었지요. 퀴리부인은 가장 먼저 베크렐의 실험을 다시 한 번 해 보고, 그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지요.


순수한 우라늄에서 나오는 방사선과 우라늄이 섞여 있는 화합물에서 나오는 방사선의 양이 똑같았던 거예요. 이것은 어떤 화학 반응에 의해 방사선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라늄원 자가 자체적으로 방사선을 뿜어내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지요. 퀴리부인은 우라늄처럼 스스로 방사선을 만들어 내는 능력에 방사능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방사능을 가진 물질들을 찾아보았어요. 그 결과, 퀴리부인은 우라늄뿐 아니라 토륨이라는 광물에서도 방사선이 나온다는 것을 쉽게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방사능 물질 연구에 푹 빠져 있던 가운데 퀴리부인은 피치블렌드라는 광석에서 우라늄보다 훨씬 강한 방사선이 나오는 것을 알아냈어요.


이것은 피치블렌드 속 에 우라늄보다 강한 방사선을 만드는 원소가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퀴리부인은 남편과 같이 피치블렌드 속의 새로운 방사선 원소를 찾는 실험을 했습니다. 낡고 허름한 창고 실험실에서 새로운 원소를 찾는 것은 매우 힘겨운 일이었어요. 광석에는 수많은 원소들이 들어있는데 이들을 따로따로 분리하는 과정은 매우 고된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광석을 갈아 가루로 만들고, 그 가루를 체로 거른 다음 끓여서 녹이고, 액체를 증발시키고, 남은 것을 여과하고 증류하기를 반복하며 퀴리 부부는 방사능 물질들을 분리했어요.


그리고 마침내 퀴리 부부는 피치블렌드 속에서 우라늄보다 강한 방사능을 가진 두 종류의 새로운 원소를 발견했어요. 한 원소는 퀴리부인의 조국 이름인 폴란드에서 따서 폴로늄이라고 이름을 짓고 다른 하나는 방사능을 뜻하는 영어 라디에이션에서 따와 라듐이라고 지었습니다. 폴로늄의 발견으로 퀴리 부부는 1903년에 베크렐과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받았어요. 하지만 라듐의 경우는 폴로늄처럼 간단하지가 않았어요. 라듐은 순수한 금속이 아니라 화합물의 형태로 추출되었기 때문입니다. 라듐의 화합물에서 금속 라듐을 분리하기 위해서는 전기분해를 해야 했어요. 퀴리 부부는 다시 작업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런데 한창 함께 실험을 하던 1906년 4 월 19일, 슬픈 일이 닥쳤습니다. 피에르가 무거운 짐을 가득 싣고 과속으로 달리던 마차에 치여 죽고 만 것이지요. 퀴리 부인은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절망에 빠졌지만 소르본 대학교에서는 피에르가 맡았던 교수 직을 퀴리부인에게 물려줌으로써 연구를 도와주었어요. 이렇게 퀴리부인은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소르본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고, 그 후 1910년에 퀴리부인은 오랜 실험 끝에 광택이 나는 하얀 금속인 순수한 라듐을 얻는 데 성공했어요.


그녀는 라듐을 발견한 공을 인정받아 1911년에 두 번째 노벨상인 노벨화학상을 받았답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퀴리부인은 큰 딸 이렌과 함께 X선 장비를 이용해 부상자들의 몸 속에 박힌 탄환이나 파편을 찾아내 병사들의 치료를 도왔지요. 전쟁이 끝난 뒤 1918년에는 라듐의 평화적 이용을 위해 라듐 연구소를 세웠어요. 퀴리부인이 라듐 제조법에 대해 특허를 냈다면 엄청난 부를 얻을 수 있었겠지만 그녀는 특허를 내지 않고 모든 과정을 공개했습니다.


그것이 학문을 발전시키고 젊은 후계자들을 격려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지요. 1934년 7월 4일, 퀴리 부인은 백혈병으로 쓰러져 67세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1894년 이후 40년 동안 퀴리부인이 쏘인 방사선의 양은 일반인이 일상생활에서 평생 접하는 방사선 양의 600억 배 정도였어요. 그녀가 남긴 실험 기록 노트에서는 아직까지도 강한 방사선이 검출된다고 합니다.


정완상 교수님은 서울대학교 무기재료공학과를 나와 KAIST에서 초중력 이론으로 이론물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92년부터 국립 경상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전공 분야는 중력 이론과 양자대칭성 및 응용수학으로, 현재까지 수학·물리 분야의 국제 학술지에 1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